차원과 차원의 틈. by 마른곰





가끔 나의 소중한 이가 그가 아는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는 말을 들을때면 머리가 윙윙 울리곤 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사람에 대해 어떠한 가상의 상, 이미지를 머릿속 페이퍼에 희미한 실낱같은 펜촉으로 천천히 그려보기도 한다. 세밀하고 구체적일 필요는 없으며 단순하며 가느다란 선으로 희미하게 스케치 정도만 해보는 것이다. 가끔은 정말 한번쯤 만나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뭉글뭉글한 구름 사이를 피해서 다가오는 햇빛 같은 상이 그려지기도 하고, 가끔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잿빛 하늘 같은 이미지가 미안함과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나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제삼자도 나라는 사람에 대한 단편적인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솔직스레 말하자면 그 사람이 그리는 나의 그림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전시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의자처럼 관심이 가지 않는다. 아니, 기왕이면 긍정적인 쪽이었으면 하는 희망은 가져보겠지만. 나는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어떻게 설명되고 그것을 듣는 미지의 상대방이 어떻게 느꼈는지보다, 그 사건을 다시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그녀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꾸려가고있는지가 훨씬 더 가치 있고 숭고한 그림이라고 여겨진다. 나에게 어떤 윤곽을 그려주었는지, 어떤 색들을 붓질해주었는지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어 괜스레 자질구레한 부분들까지 캐물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잦은 질문들을 쉴새없이 해대면 그녀에게는 내가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으로 동요하는 것으로 보일까봐 이내 그만두곤 하였다. 애초에 나에게는 내 자신이 그림을 조금 더 잘 그리고 싶다거나, 섬세하고 정밀하게 무언가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열망보다는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어떤지, 어떤 상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존재에게 어떤 식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는가이다. 실체를 벗어난 이미지는 그것을 전달하면서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어떠한 형식과 뉘앙스, 그리고 자신의 기대감과 상상력이 작용해서 어느정도 허구화된 이미지가 되지만 실체에 기인하여 만들어진 이미지는 원본과 여러모로 가깝거나 생각을 넘어서 실재하는 존재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종의 ''이 된다. 그것과 벗어난은 발단이 실재하는 무언가였더라도 결국은 하나의 가상의 창이고 또 다른 차원에서의 실재이다.

 

우리는 넘실거리는 파도가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바다의 어딘가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작은 깃발을 배에 꽂고 유랑하는 존재이다. 가끔은 넘실거리며 흘러가다가 다행히 한 뼘 정도의 작은 땅을 발견하여 물에 젖은 발로 하얀 모래를 밟게 되겠지만. 결국에는 그곳에서도내가 여기 있어요.’라는 쪽지를 병에 담아 저 너머의 누군가에게 닿길 바라며 파도에 던져버릴 수밖에는 없는, 그런 운명에 처해있는 것이다. 유리병이 운 좋게 제대로 된 발신인에게 닿더라도 그 또한, 그가 그곳에 있군.’이라는 말과 함께 다시 끝을 알 수 없는 바다로던져져 넘실거리며 미지의 누군가에게, 혹은 잠깐 스쳐 지나간 이들의 손에 닿게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유리병에 비친 당신의 가늘고 긴 속눈썹을, 길게 뻗어 끝이 약간 뭉툭한 코를, 구체적이고 온전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발신인조차 존재를 잊어버린 쪽지일 뿐이라서 그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수많은 분열된 존재 중 하나인 쪽지는 이미 실재의 나와는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와 다른 차원에 있는 실재의 자신은나를 바라봐 주세요.’라는 쪽지가 담긴 병을 아무리 여러 개 파도에 던져대도 절대 해소될 수 없는 욕망에 가슴만 타오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파도에 표류하던 누군가 그 한 뼘의 땀을 발견하고 도착하더라도 알아채지 못한다.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석상. 그 석상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나면서 발 디딜 공간이 왜 이리 부족하기만 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차원과 차원의 틈. 우리는 어느 곳에 떨어져있는가.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반지하를 포함한 3층의 다세대주택이다. 집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을 편하게 하고(심호흡을 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의식이 아니다.) 대문을 열어 건물안으로 들어온다.(이 검고 무거운 문은 내가 이곳에 처음 살았을때부터 이미 고장이 나있었는데 그냥 닫으면꽝 하는 큰소리와 함께 잠겨버리기 때문에 조심스레 닫아주어야한다.) 그리곤 집주인이 모아둔 폐지더미들을피해서 약 10개 정도의 계단들을 올라온 후 그 위에 위치한 문 앞에서 주머니를 뒤져 얼마 전 새로맞춰 아직은 맞물림이 뻑뻑한 열쇠를 찾는다. 열쇠를 꺼내 문고리에 꽂아 넣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보이는것은 두 개의 문. 차원과 차원의 틈. 문득 잊고 있었던 볼 일이 생각난다면(집 앞 슈퍼에서 담배를 산다거나 우유를 산다거나 하는) 잊지 말고 다시 열쇠를 잘 챙겨 나가야한다. 외출이래봐야 오분 내외로 집의 문을 열어놓아도 될 정도의 시간이라지만 그동안에 고장난 대문이 닫혀버리기라도 한다면 아찔한 일이기 때문이다.반바지에 씻지도 않은 얼굴의 꾀죄죄한 몰골로 문을 열어줄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할 것이다. 그럴 때 집에 가족이나 손님이 와있다면 다행이다. 언제든 문을 열어줄 사람이 있기에 잠깐 동안 주머니에서 달그락거리며 거슬리는 금속의 마찰음을 듣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열쇠 없이 나갈 때가 많았는데 문제는 문이 닫혀버렸을 때 그 사실을 집 안에 있는 사람이 언제, 어떻게 알아채냐는 것이었다. 덕분에 집밖에서 문 좀 열어달라며 소리를 쳐야만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소린 집 안에선 잘 들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웃주민들에게는 큰 스트레스로 여겨질 일이었다. 다행히도 몇 번은 잠깐 나간다더니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나와 주는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계속해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은 한심한 일일 터였다. 그래서 달그락 거리는 열쇠소리대신 보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고작 집 앞의 슈퍼를 가면서 말이다. 차원과 차원의 틈을 연결해 주는 도구. 핸드폰은 이런 경우에도 우리에게 전달의 편의성을 제공해주었다. 더 이상 열쇠를 놓고 간 동생을 신경 쓰고 있을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고 혹시나 핸드폰의 진동음이 지잉-하고울리면 잠시 내려가 그 무겁고 검은 문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열어주면 그만이었다. 사라지는 것도 있다. 혹시나 동생이 문이 잠겨있어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하는 걱정. 5분 정도의 짧은 시간에 특별한 존재에 대해 의식하고 그 실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염려하는 수고스러운 과정을 더 이상 거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신 그 시간 동안 단지 인터넷에 익명으로 게재된 우습고 과장된 경험담을 읽으며 낄낄대고 있을 수도 있고,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마지막으로 5년 전에나 보았을 동창생이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도 있다그 가상의 존재들의 차원들이 펼쳐진 선분에, 하나의 점을 찍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남동생의 존재는 어느 차원에 있을까. 굳게 닫힌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표류하는 것이 아닌, 문이 닫힌 상태에서도 언제든 가볍게 연락이 가능한 존재로서 당신의 머릿속에서 표류하고 있을 그의 존재는 말이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실제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차원의 약 5분을 잃어버린 격이며 그것은 나 자신의 실재의 한 모퉁이가 깎여나간 것이고, 상대는 특별한 존재에게 할애할 공간을 다른 차원의 가상의 존재에게 낭비하게 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5분이란 시간은 길게는 100년을 사는 존재에게는 찰나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또한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인간의 차원, 생동감을 넘어서 살아있는 순간의 차원에서는 광활한 달의 표면과도 같은 것이다실제로써 존재하는 차원. 자아의 분열된 가상의 차원. 그리고 차원과 차원의 틈. 살아있음의 생생함. 그리고 봄.

우리는 어쩌면 넓어지는 세계, 운송수단의 발달로 인한 활동 범위의 물리적 확장이든 인터넷이나 대중 매체를 통한 소통적 확장이든, 전에 비해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감각적 범위를 지니게 된 것과는 별도로 실상 너무나도 '좁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덧글

  • 차원이동자 2011/06/30 00:12 # 답글

    현대사회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공간적 차원은 넓어지고 있는 반면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감성적,심적 차원의 폭은 줄어든것 같습니다
  • 마른곰 2011/06/30 00:32 #

    와, 읽어주시고 덧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합리적인 진보와 야만을 넘어선 인간성의 진화 사이에 놓여있는 시대일까요. 하하.
  • someone 2011/06/30 00:44 # 답글

    개인이 느낄수있는 세계의 공감각적 확장은 소중한 것에의 집중을 방해해요.
  • 마른곰 2011/06/30 01:05 #

    감사합니다다. 소중한 것에 집중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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